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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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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호루스의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8.♡.198.202), 작성일 17-01-07 07:16, 조회 5,053, 댓글 0

본문


사람들은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서 자신을 구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아직도 깨달음은 사람들 속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누구도 깨달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나 정확한 가르침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깨달음 그 자체가 삶의 중요한 목표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만일 삶 자체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살아야 할 하등의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옛날부터 깨달음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허비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정작 깨달음을 완성했다는 기록은 수천 년 전에 한 사람이 나타났을 뿐이다. 이러한 일은 인간의 세계에 깨달음을 위한 길이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좋은 가르침이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에 전해질 수 없었는가. 사람은 의식에 의해 조종을 받으며, 의식에 의해 활동을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 의식에 맞지 않는 일은 받아들이지도 않고 제대로 볼 수도 없으며 제대로 전할 수도 없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없게 하는 문제점이었다.

왜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를 축복하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가?

우리가 인간을 영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에서는 그 영적인 사고가 인간처럼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적 동물이라 함은 하나의 의식에 의해서 알고, 느끼고,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계획하고, 판단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은 의식의 지시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식 속에 선업이 없는 자는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거부해 버린다. 이것은 세상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4대 성인의 삶을 통해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고, 또 불교에서 전해지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왔던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깨닫고 싶다, 깨닫고 싶다' 하더라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깨달음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 속에 있는 일을 이해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일이 사람에 따라서는 잘 안 된다.

이런 일은 과거로부터 자기 속에 있던 일에 의해서 거부되기 때문이다. 인연이 없으면 부처도 중생을 구하지 못한다는 말을 석가모니는 남겼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인연이 없는 자는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것은 자기 속에 본래 좋은 인연이 지어지고 있지 않으니 좋은 인연과는 연이 닿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거의 세상에서도 깨달은 자가 나타났지만 그 깨달은 자의 옆에는 사람이 오지 않았다. 일반 대중은 그를 알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깨달은 자는 82살이 되어 길 위에서 죽을 때까지 걸어 다니면서 깨우치려 했다. 문명의 혜택이 없었으니 나그네의 행보를 계속하면서 도보로만 여행을 해야 했던, 그 시절 설마 부처가 가마를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그런 대접은 못 받았을 것이다.

그의 곁에는 항상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끝없이 나그네의 여행을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깨우치려 했던 그 이외의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의 손에 의해 해침을 당했다. 소크라테스나 예수는 사약을 받던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야 하는 극형에 처해졌으며 노자는 일생동안을 떠돌아다니다가 죽어야 했다.

그런데 왜 후세의 사람들이 그들을 성인이라고 말했겠는가? 그것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그 가르침 속에 진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성인이라고 평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성인의 대접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이 죽고 난 먼 훗날이었다.

그들은 살아서는 성인이 아닌 가장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다.

우리가 인간의 세계에 깨달음을 주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외로움과 고통을 느끼게 한 것은 인간 세계에 진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진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 속에서 일어났던 현상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에 대하여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함으로서 깨달음을 통해서 자기를 구원하거나 또는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가 깨달음을 가까이 하고, 깨달음을 위한 가르침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이유는 진실에 대한 눈을 뜨기 위해서 이다. 그러니까 진실을 알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이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깨달은 자가 나타났을 때 공통되었던 일은 근원의 세계를 보았다는 사실이다. 이 근원의 세계에는 업을 가지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다.

업이 모두 소멸되었을 때 근원의 세계에 이르게 되는데 이 근원의 세계는 바로 모든 것이 죽고 태어나는 자리이다. 이 근원의 세계를 본 자는 이 세상에 태어난 자 중에 단 두 사람뿐이다.

한 사람은 석가모니이다.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은 자가 공통적으로 보게 되는 세계는 바로 이 근원의 세계였고 해탈의 세계이었다. 해탈을 한 자만이 그 근원의 세계에 들 수 있으므로 해탈을 한 세계가 바로 근원의 세계인 셈이다.

쉽게 말해서 진실이라는 것은, 완전한 진실을 얻게 된다는 것은 모든 거짓에 물들어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해탈할 수 없다.

해탈을 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깨달을 수 없다. 즉 마지막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완전한 진실의 눈을 뜨기가 어렵다.

깨달음이란 자기의 가정을 버리고 입산 수도를 해야 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가정을 가지고도 얻을 수 있고, 또 입산 수도를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깨달음은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가족을 버리고 입산수도해서 히말라야 산맥 같은 곳에서 오랫동안 노력했던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고 자기를 버리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속에 업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그 업을 버리지 않는 상태에서 깨닫기를 원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기를 죽이는 일을 한 것이다.

업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의 사고를 있게 하는 모든 분별력은 우리 속에 있는 과거의 일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자기 속에 쌓아두었던 업을 떼어버리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깨달을 수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깨달은 자가 나오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

세상에 입산 수도를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또 어떤 수행, 진리의 방법이 아닌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더 큰 업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남을 속이고, 남을 해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들을 했다고 본다. 이는 오늘과 같은 사회에서 어디를 가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어떤 사람들의 욕망이나 희망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바로 가르침 속에서 얻어지는 것인데 지금까지 그 가르침이 명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다고 하겠다.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성취하고, 남도 깨닫게 할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석가모니도 사람들에게 "있는 일을 보아라!, 있는 일을 배워라!, 있는 일을 알아라!"라고 밖에 가르친 것이 없다.

그리고 있는 일에 대해서 물으면 있는 일을 석가모니 자신이 본 대로 설명했다. 바로 그 있는 일이 사람들을 깨우치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있는 일을 가르친 것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임종 앞에서, "스승이 죽으면 이제 우리는 누구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자기를 통해서 배우라" 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나의 것을 가르친 것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은 바로 세상에 있는 것을 말했을 뿐이라는 것이고, 세상에 있는 것 그 자체가 깨달음을 보게 하는 길이라고 말한 것이다
.

"내가 잘못했을 때 나는 그로 인해서 당연히 그 업보를 받게 되는 것이고, 내가 잘 했을 때 나는 당연히 거기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과응보이다. 응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인과응보이다."라고 하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에 의해서 자신이 얻게 되는 결과에 대해 만족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함정이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만족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옳은 사람이다. 옳지 않는 사고를 가지고 살다보니까 정당한 것을 거부하고, 정당하지 않는 것을 바랬던 것이다.

지금의 세상은 더욱 그렇다. 산에 가서 기도한다고 차를 대절하고, 자가용을 끌고 간다. 그 바위 밑에 가서는 수천 원, 수만 원, 수십만 원을 그냥 내어놓는다. 거기다 빨간 물감으로 쓴 부적을 한 장 더 붙여 주면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도 내놓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가 노력해서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어떤 대상에 의해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렇다. 헛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이런 일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거짓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거짓을 버리지 못하면 절대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한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자기를 축복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 자기를 버리고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석가도 같은 말을 했고, 예수도 같은 말을 했으며, 모든 성인들이 같은 말을 했다. 이 시대는 말세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당연하게 자기를 해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면 왜 이런 비정상적인 일들을 끝없이 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무지 때문이다. 무지가 자기를 속게 하고, 남을 속이게 하고 있다. 이 무지는 깨달음의 적이다. 이 무지한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들을 믿으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을 통해서는 영원히 깨달음을 얻기는 고사하고, 자기 자신도 보존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이 망해버리면 동물로도 태어날 수 있고, 식물로도 태어날 수 있다. 어떤 것으로도 변화할 수 있다. 의식자체도 그 의식이 망하면 다른 의식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바로 진실을 얻는 것이다. 진실을 자기 속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 일은 그리 쉽지가 않다. 우리는 이런 일을 두고 여러 곳에서 관찰한 결과 그 해답을 얻어낼 수가 있었다.

그 해답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오염 물질이 가득한 물동이에 계속 맑은 물을 집어 넣으니까 그 물동이에 들어가는 압력에 의해서 그 흐려있는 물이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있는 일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있는 일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도 진실이 깨어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진실을 깨우쳐야 한다. 진실을 깨어나도록 해야 한다. 좋은 가르침은 인간을 깨우치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인간을 깨우치는가? 있는 일을 내어놓고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요즈음 세상은 무지하니까 있는 일을 내어놓고 사람을 깨우치려면 그것을 들으려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세계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지만 그 많은 나라 중에서 이 한반도의 사람들은 더욱 유별나다.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현실들이 무엇인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암담한 현실이다. 많은 문제가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결과뿐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기대하다 보니까 거짓이 난무하게 되고, 속임수가 난무하게 되고, 남을 괴롭히는 일이 난무하게 된다. 그러니 세상이 좋을 수가 없다.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은 좋아질 수가 없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점점 더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내고 그 문제 속에서 살게 된다는 말이 된다.

깨닫지 못한 자는 자기 속에 있는 업의 작용에 의해서 자신을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깨달은 자는 있는 일을 보고, 그 있는 일에 맞추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깨우침이 큰 자들은 자신 속의 업의 지시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있는 일을 보고 있는 일에 맞게 움직이니까 이 업이 자기 속에서 활동을 할 수가 없게 된다.

세상의 모든 뜻은 활동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활동이 없으면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세상에서 아무 활동도 없으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죽은 그대로 존재한다. 세상에 온갖 활동이 존재하기 때문에 만물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업 자체도 활동이 없으면 죽어버린다. 하지만 업 자체는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 다시 태어난 것 속에서는 자신 속에 간직되어 있던 것이 계속 활동을 해서 그것을 자신 속에 존재하게 한다. 그러니까 한 번 존재하는 것은 깨달음이 없이는 영원히 자기 속에서 몰아낼 수가 없다.

그러나 깨우침이 크면 바로 업의 작용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있는 일을 보고 그 있는 일에 맞게 행동하게 되므로 업이 할 일을 잃게 된다. 그렇게 해서 업 자체가 약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진실이 커진다는 것이다.

깨달음이 없으면 자신을 망하게 하고, 깨달음이 있으면 자신을 점점 좋은 쪽으로 만들어 가게 된다. 그래서 계속 진실을 키우고 업이 작아지면 누구든 얼마든지 수행을 통해서도 해탈이, 고행을 통해서도 해탈이, 사랑을 통해서도 해탈이 가능해진다.

세상의 일은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서 단순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하다. 실제로 세상의 일은 모든 것이 단순하게 정해져 있다. 단순한 뜻에 의해 정해져 있다. 그러나 이 단순한 것을 모를 때 우리는 그것을 알아내기가 너무나 복잡하다.

오늘날 인간들은 컴퓨터나 어떤 새로운 기계들을 이용해서 온갖 것들을 알아내고 있다. 그러나 그 컴퓨터도 알아내지 못하는 것이 있다. "어떻게 사람을 깨우쳐야 하는가?"이다.

한 사회가 침몰하고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 변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회가 망하기 전에 먼저 망하는 것은 의식이다. 의식이 망하지 않으면 사회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

바로 우리들을 움직이고 있는 이 의식이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사회에 많은 어려움이 존재하고 그 어려운 일들이 우리의 삶을 암울하게 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서 엄청난 잘못된 일들이 존재해 왔다는 증거이다.

세상의 일은 절대로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게 되어 있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나타날 수가 없었다.

열악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본 사람들이 다른 외부세계에서 대접을 받고 있는데 한국사람이 그만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환경 때문이고, 또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전통 때문이며, 일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제도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외국에 나가서 일본 사람만큼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우리 한국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식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깨우치고 난 이후에는 아무리 나쁜 일을 강요해도 나쁜 일을 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은 바로 의식 속에 있는 일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을 깨우치지 못했을 때에는 아무리 좋은 일을 하라고 기도를 해도 좋은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의식을 있게 하는 뜻이다.

바로 이 의식의 세계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사람을 망치게 되고 사람은 그 사회를 망치게 되는 것이다. 사회는 인간을 바탕으로 해서 존재하고 인간은 그 사회를 바탕으로 하여 존재한다. 사회와 인간은 동전의 앞 뒷면과 같은 관계이다.

개인은 사회를 바탕으로, 사회는 우리 개개인을 바탕으로 하여 존립한다. 그러니까 그 사회에 나쁜 사람들이 득세하면 그 사회는 망하게 되는 것이고, 그 사회에 좋은 사람들이 득세하면 그 사회는 좋아지게 되어있다. 이것이 바로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우리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겠다.

과거의 세상에 태어났던 고타마 붓다가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것은 사실이다. 그가 해탈을 했고, 또 근본의 세계를 보았으니 그가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은 있는 일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쉽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못했다.

첫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거짓이 없어져야 한다." 즉 진실이 나타나야 된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거짓이 없어져야 된다는 것은 진실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 "있는 일을 보아야 한다." 옳고 그름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옳고 그름이라는 것은 말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일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옳은 결과가 나타나면 그것은 옳은 일이고 나쁜 결과가 나타날 때 그것은 나쁜 일이다.

우리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있는 일을 모르면 좋은 일을 만들어 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있는 일을 보아야 한다. 있는 일이 어떻게 해서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 있는 일이 좋아지고 나빠지는가 하는 인과의 법을 알아야 한다. 그 속에 있는 뜻을 알아야 한다.

셋째, "양심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있는 일을 밝히는 것처럼 힘들고 외로운 일이 없다고 반복 강조했다. 과거의 성자들의 삶이 그랬고, 또 우리의 역사 속에 올바른 사고를 가지고 세상을 좋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러했다.

세상을 좋게 만들려면 있는 일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 있는 일을 제대로 가르치려 했던 사람들은 모두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다. 그러니까 양심과 용기가 없다면 있는 일에 아무리 눈을 떠도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넷째, "끝없는 사랑이 자신 속에 있어야 한다."

끝없는 사랑이 있어야 남에게 가서 가르치려 할 것이다. 용기와 양심이 있어야 옳은 일을 남에게 끝없이 가르치려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중에 하나가 없어도 안 된다.

고타마 붓다는 전생에 끝없는 깨우침이 있어 스스로 한없이 그 깨우침을 통해 있는 일을 보고 있는 일을 통해서 배웠다. 끝없는 활동이 자신의 업을 아주 작게 만들어 놓았다.

이처럼 작은 업을 태우기 위해서 고행을 하면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겠다는 일구월심(日久月深)의 열망에 그 끈기가 자기 속에 불을 일어나게 해서 그 불로서 업을 소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너무 힘들고 또 그러한 가르침이 잘못하면 사람들을 폐인으로 만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고타마 같은 사람은 억겁의 세월을 통해서 태어나며 선업을 쌓았기 때문에 악업을 제거할 수 있었지만, 악업이 큰 자가 그런 가르침만 가지고 노력할 경우 결국 자기 속에 있는 문제에 의해서 폐인이 되어 버린다.

신체의 기관을 망쳐 버린다는 말이다. 타이어도 공기를 넣다 보면 어떤 압력 이상이 넘으면 터져 버린다. 우리가 어떤 물질을 다룰 때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을 넘어선 압력이 올 때는 그것이 붕괴되어 버린다.

우리 몸의 기관도 또한 정신적 압력이 계속 가해지던가, 자기가 지탱할 수 없는 압력을 받게 되면 그로 인해 손상을 입을 수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모두가 하나의 영적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에 돌아와서 살고 있으니까 누구나 자신이 확인해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과거의 세상에서 얼마나 선행을 했는가, 무지하게 살았는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자기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깨달은 자가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자기가 깨달은 자가 될 것이라던가, 그런 것을 생각하리라고는 전혀 몰랐다. 그는 전생에 어느 정도의 공덕을 지었으며 전생에 무엇이었다는 것조차 알고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모두가 똑 같다고 할 수 있다. 고타마 붓다는 자신이 그런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깨달음에 대해서 충분한 길을 설명하지 못했다. 다만 하나의 공덕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지만 이 공덕 자체를 사람들은 잘못 이해하고 있다.

예컨대 사기꾼에게 돈을 직접 주고 속아도 그 사기꾼이 "당신은 큰 공덕을 지었다"고 하면 무지한 장님과 같은 사람들은 그 말만 듣고 그렇게 한 줄 안다.

그러나 결과는 다르다. 이 무지한 사람은 그러한 일이 자기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 인가도 모른다. 그러므로 말로만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겠다.

깨달음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깨달으면 누가 밥을 가져다 주는가? 돈을 가져다 주는가? 출세를 할 수가 있는가?

이런 점을 의문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이다. 단, 남이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획득한다고 하겠다.

자기가 돈이 필요하면 일을 통해서 돈을 만들어낸다. 어디에 가서 남의 금고를 털어서 돈을 만들어 오는 것이 아니고, 일을 통해서 돈을 만들어 온다. 그런 방식으로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왕이 되기도 한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근본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자는 태어나면 왕이 되던가, 성군(聖君)이 되던가 큰 지도자가 된다"말을 했다.

이미 크게 출세할 수 있는 길을 가지고 태어나며 크게 부귀할 수 있는 길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깨달음으로 해서 자기의 부족한 것들을 거기에서 얻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자기를 태워야 한다. 있는 일을 찾아서 자기를 태워야 한다. 열심히 일해도 있는 일을 알면 속이 탄다. 증오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속이 탄다. 속을 태워라. 그러면 그 일을 통해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 속을 태워도 결과는 같다. 남을 위해서 속을 태워도 결과는 같다. 남편을 위해서 속을 태워도 결과는 같다.

속을 태우는 것과 속을 끓이는 것은 비슷하다. 속을 끓일 때는 속이 아프다. 증오심이 일어난다. 밉고 증오심이 일어나고 속이 끓는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것이 속이 끓는 것인지 속이 타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 세상의 있는 일을 이해하고, 남편의 하는 일을 안타까워한다던가 자식이 하는 일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던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을 안타깝게 생각할 때 가슴이 탄다.

하지만 내 마음이 타기만 타고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고 속에 불이 활활 나고 더워지는 것은 타고 있음을 말한다. 증오심이 생기면서 속이 아프거나 쓰린 것은 속이 끓는 것이다.

증오심이 생기는 것은 업을 쌓는 것이고,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고 속이 타는 것은 업을 태우는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던가, 모든 것을 사랑하다 보면, 사랑하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일들이, 사랑하는 대상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들이 안타까워진다. 그 안타까움이 자기를 태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잘 알아야 한다.

절이나 교회에 가고 사회의 사람들을 따라 가야 공덕을 짓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얼마나 자기 속에 깨달음을 담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사랑하는 대상을 많이 갖고 자기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는가가 중요하다. 이때 바로 그 행동들이 나오게 된다.

이 행동 속에서 불이 일어날 수 있고 그 불이 자기의 업을 태워주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태워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진리 속에 있는 가르침들이 필요한 것이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진리가 대단한 것처럼 말을 한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진리를 대단하게 말하지 않는다. 진리라는 것은 있는 일 그 자체이며 눈만 뜨면 보이는 모든 것들이 진리이다.

어떻게 깨달음을 얻고 어떻게 자신의 삶을 축복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들의 최고목표다. 그 깨달음이 자기를 축복하는 일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자기 속에 있다. 자기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사람들은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 소원일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 보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교육은 창조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의 암기이다.

한국에서 가르치는 교육을 다른 외국에서 가르치는 교육과 같이 보아서는 안 된다. 한국의 교육은 집중적인 암기력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러니까 책 속에 있는 많은 문제를 삽입해서 그 문제를 머리 속에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시험을 치르면 백 점을 받는데, 공장에서 일을 시켜보면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러니까 교육이 오히려 사람의 의식을 버려놓았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주지 않는 교육은 진정한 교육이 되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을 망쳐버릴 수도 있다. 창의력이 뒤떨어지니까 자신이 어떻게 해야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남에게 다른 어딘가에 미루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있는 일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결국 자기의 뜻에 의해서 살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사회의 영향에 의해서 살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뜻에 의해서 살게 된다. 그러면 자기가 옳다고 판단한 일을 자기가 하면 되는 것이다.

왜 우리 사회는 자신의 뜻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뜻으로 살아야 했나. 그 결과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많은 어려운 일들이 존재하고 있다. 인간을 망쳐 버렸기 때문에 그 인간이 사는 세상이 망할 판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런데 한 번 망해버린 사람이 다시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그 모든 의식을 버리고 새로운 의식을 얻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왜 우리에게 깨달음이 필요한가 하는 것은 깨달음만이 자기를 위험으로부터 건질 수 있는 길이요, 이 깨달음만이 자기의 끝없는 내세를 밝은 쪽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축복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남을 사랑할 수가 없다. 내가 남을 사랑하는 것은 나에게도 큰 이득이 있다. 세상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보다도 더 큰 대가가 어디에 있는가?

깨달음은 자기를 잘되게 한다. 만일 사람들이 세상의 일을 깨닫고 보면 근면하고 검소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근면하고 검소하고 정직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스스로 훌륭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절대로 망할 수가 없다.

망하지 않는 자신을, 영원한 자신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의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이 깨달음을 얻는데 가장 큰 길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위대하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사랑을 어떻게 보는가? 최소한 남자와 여자가 어딘가 은밀한 곳에 가서 서로 나누는 애정의 표시를 두고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이라는 말은 존재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가르치지 않고 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바로 축복하는 것이다. 내가 한 일이 상대에게 축복이 된다면 그것은 상대를 축복한 것이고 세상을 축복한 것이다.

내가 자식을 위해서 밭에 나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될 수 있다. 가족을 위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일할 때 그것은 바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사랑하기 위해서 이고, 사랑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절대 깨달음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자신을 깨우치게 되면 깨달음은 매우 쉽고 단순한 곳에 있다.

깨달음을 가로막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속에 있는 잘못된 일들이 계속 자기 속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을 뿐이다.

있는 일이 얼마나 우리 자신을 깨우치는데 중요한 바탕이 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깨달음에 대해서 더 이상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없고, 자신을 깨우칠 수도 없다고 하면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일을 통해 최고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할 수가 있다. 이 가르침을 통해서 좋은 사람을 만들어내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만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근원이 될 것이다.